이기호 「하지 지나 백로」 해설 및 변형문제
김유정 「봄·봄」의 뒷이야기를 재구성한 소설: 인물의 관계 변화, 계약서와 지게막대기, 화해와 연대
01 교과서 수록 작품 원문
앞부분 줄거리
어제저녁 장인이 ‘나’를 찾아와 ‘그놈’ 얘기를 하며 서럽게 울어 댔고, ‘나’는 여러 감정이 들면서 작년 가을을 회상한다. ‘나’는 점순이가 열여덟 살이 되어도 여전히 장인이 성례를 시켜 주지 않자, 점순이가 일러 준 대로 지주인 배 참봉 댁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얘기하겠다고 장인을 협박했다. 마침내 점순이와 혼인한 ‘나’는 성례 후에도 막내딸 끝순이의 배필이 데릴사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농사일을 계속 거들겠다고 장인과 약속했으나, 점순이의 만류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개 · 약속이 마음에 걸리는 ‘나’
그러니까 내가 조금 켕기는 것이 바로 그 약속 때문이었다. 내가 장인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장인님은 내가 일을 도우러 오지 않자, 몇 번을 우리 집에 찾아와서 ‘박 서방 게 있는가?’ 하고 불러 댔다. 그때마다 나 대신 점순이가 마실을 갔다는 둥, 천렵을 갔다는 둥, 잘도 둘러댔다. 과연 점순이의 말대로 장인님은 흠흠, 헛기침만 몇 번 했을 뿐 예전처럼 지게막대기를 들지도, 성을 내면서 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 장인님이 또 급하게 데릴사위를 들인 것이라 생각하니, 관격이 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졌던 것이다.
끝순이의 데릴사위를 하겠다고 들어온 사내는, 체격은 나보다도 머리통 하나는 더 작았지만 눈꼬리는 마치 족제비처럼 위로 솟은 게, 마냥 어수룩해 보이지는 않은 친구였다. 소학교까지 다니다가 돌림병으로 부모도 잃고, 그 바람에 제 신세가 따분하게 여겨져 이곳저곳 떠돌다가 우리 동리까지 오게 되었다는데, 나를 보자마자 ‘형님, 형님’ 굽실굽실해 대는 꼴이 그리 썩 미덥진 않았다. 더구나 그 친구가 오고 난 뒤부터 장인은 날 볼 때마다 ‘뭐, 일을 여간 잘해야지. 자네처럼 한 입으로 두말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하면서 비아냥거려 까닭 없이 약이 오르고 성이 나곤 했다.
한데, 바로 어제저녁, 우리 집에 들른 장인님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대던 막냇사위 때문에 눈물을 떨구고 방바닥을 쳐 대면서 하소연을 한 것이었다.
위기 · 막냇사위와 장인의 계약
“내가 호랭이 새낄 받았지, 호랭이 새낄 받았어. 집 나온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리 장인님이 이번엔 제대로 된 사위를 하나 얻은 것 같았다. 춘분 지나 모도 다 혼자 내고, 그러면서도 장인님한테 살살거리면서 마음을 주는 게 기특해 막내 데릴사위와 술을 한잔 마셨다는 것이다. 또 예전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끝순이가 웬만큼 크면 성례를 시켜 주겠다고 약조를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렸는데, 그러다가 이 막냇사위란 친구가 ‘그럼, 그러지 말고 장인님이 여기 지장 한 번 찍어 달’라고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다는 게 아닌가. 술도 얼큰해졌겠다, 글도 잘 몰랐던 우리 장인님은(그랬다, 우리 장인님은 나처럼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누구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겠나.’ 하면서 호기롭게 지장을 꾹, 찍어 주었다는데, 그게 우리 장인님의 수염을 잡아챈 꼴이 되고 말았다.
“그다음 날부터 이놈이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고…… 당장 꺼지라고 해도 빙장님, 빙장님, 저하고 계약을 했잖아요, 저기 안목골 논만 제가 돌보면 된다고. 그건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빙장님은 아무 걱정 마세요……. 오늘 저녁에 어떻게 닭 한 마리라도 잡아서 술 한잔할까요, 이러기만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그놈이 우리 집 재산 다 축낼 판일세.”
장인님은 그렇게 하소연을 해 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막내 데릴사위가 용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역시, 사람은 글을 배워야 하는 것인데…… 나는 글을 모르니 육 년이나 데릴사위를 한 것이지……. 나는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절정 · 점순이의 계책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장인님과 함께 집을 나서 다시 처가로 걸어가야만 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도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우리 점순이가, 나와 장인님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걸 보고만 있어요? 지장을 찍은 종이인지 목판인지 확인을 해야지!”
장인님과 내 말을 문밖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점순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그렇게 말했다.
“봐도, 뭐…… 우리가 뭘 아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점순이가 바로 쏘아붙였다.
“누가 그걸 보고 읽으래요. 없애면 되지! 아버지 땅마지기, 엉뚱한 놈 손아귀에 다 들어가는 꼴 보고만 있을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장인님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말 · 화해와 지게막대기
장인님과 나는 어두운 밤길을 달빛에 기대 걸어갔다. 이제 하지도 지나 낮에는 뜨거웠으나, 밤공기는 그런대로 아직 시원했다. 비릿한 풀 내도 자욱했다. 어디선가 두꺼비가 시끄럽게 울어 댔고, 부엉이 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장인님은 내 바로 앞에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육 년 동안 그렇게 괄시를 하고, 또 막내 데릴사위 얻었다고 으스대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어딘지 짜부라지고 맥 빠진 노인네 한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성례시켜 주고 등도 두들겨 준 우리 장인님인데…….
나는 일부러 장인님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장인님, 예전 생각나세유?”
“무슨 생각 말인가?”
장인님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예전에 장인님이 제 바짓가랑이 움켜잡고 매달린 거 말이에유.”
풀벌레가 스르르, 스르르, 울기 시작했다.
“거, 뭐…… 좋은 일이라고 기억을 해…….”
장인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오늘, 그거 한번 다시 해 보자구유.”
그제야 장인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제가 그놈 팔을 꼼짝 못 하게 잡고 있을 테니께유, 장인님이 그놈 바짓가랑이를 움켜잡으세유. 그러면 제가 재빠르게 그놈 몸에서 그 계약서인가, 뭔가 빼낼게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장인님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르게 뒷짐도 지고, 걸음도 뒤틀게 걷기 시작했다. 이제 뒷골 콩밭만 지나면 바로 장인님의 집이었다.
장인이 툭 내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그럼 지게막대기는 사위가 들 텐가?”
여름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